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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천대신앙
운영자 2018-08-25 추천 0 댓글 0 조회 1469

기독교 효와 언약신학

이상욱 교수(신약학)

1. 들어가는 말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최초의 공동체이며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차지하는 혈연공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면에서 가족은 매우 큰 의미이며 최적화된 가정에서 성장한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올바른 인간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성을 규정하는 효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가족이라는 구성원의 행동강령이며 가장 현실적 규칙이며 합리적인 행동규범이다. 효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어머니는 어머니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즉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에 관하여 아버지의 행동규범, 어머니의 행동규범, 자식의 행동규범을 서술함으로 가족의 최적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효를 깊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가정 그 자체의 질서뿐만 아니라 가정은 모든 사회를 구축하는 기본단위가 되기 때문이다.

제방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제방의 구멍에 손을 넣어 주검으로 나라를 구한 소년 이야기처럼 가정의 붕괴는 나라를 붕괴시킬 수 있다. “로마 제국은 왜 망했는가?”에 대해 본격 탐구한 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을 들라면 178858일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저술한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이다. 기번은 로마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원인을 게르만족의 침입, 중앙집권체제의 해체, 기독교의 영향 등과 같은 정치적, 종교적 요인들 때문이 아니라 가정 붕괴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번은 그 책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가정의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제국의 몰락이 경제적으로 가정이 붕괴됨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로마의 가정(household)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세부담을 과중하게 떠안고 있었고 화폐가치의 하락에 따른 소득감소로 가계의 재정은 피폐화 되어 있었다그러나 단순히 재정적 부담이 로마의 가정들을 피폐하게 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성적인 놀이 대상으로만 여긴 도덕부재의 쾌락추구가 난잡한 남녀 혼탕과 같은 문화를 만들어 시민의 가정들을 더욱 급속히 붕괴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가정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어느 사회에서나 인정하는 것이고 국민경제와 정치 사회의 도덕적 불의도 가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로마제국을 비롯한 동서고금(古今)에서 그 증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동양의 효사상

동양은 서양보다 가정의 중요성과 윤리에 대해서 훨씬 구체적이다. 동양의 전통적 유교사상을 대변하는 가장 주요한 키워드는 바로 효()이다.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동양에서 추구하는 효사상은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자식의 도리를 인지시켜 참다운 인간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자연스러운 애정이 효의 기초이지만 애정과 도덕적 의무를 명확히 구별하여 효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물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일방적인 도덕적 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에 보이는 오륜(五倫)에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고 했고, 이는 논어'부부자자'(父父子子), 예기'부자자효'(父慈子孝)와 함께 부모와 자식 상호간에 도덕적 의무가 성립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자·맹자의 시대부터 이미 유교의 부자 윤리에서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거의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효 그 자체가 가리키는 것은 그다지 보잘 것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양의 효사상은 생각보다 훨씬 근본적이며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 효란 좁은 의미에서는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지만 더 넓히면 가정이란 공동체에서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의 위계질서에 따라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을 ''()이라고 하면서 그것의 근본 내용으로 제()와 효를 들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효의 실천방법을 제시했다. 이후 맹자는 요순(堯舜)의 도를 효제로 이해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제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주요 내용이라고 했다. 효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위한 기본적인 윤리가 되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 효 개념이 왕도정치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자는 효는 덕의 근본이라고 하였고, 맹자는 섬기는 일 중에 어버이 섬기는 일이 가장 중대하다고 하였다. 또한 유교에서 말하듯 다섯 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효심에서 출발 된다는 것이다. 공자에게 가족질서는 덕치주의(德治主義)의 바탕이 된다. 그는 가족제도를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효도를 강조 했으며 부모 섬기는 것을 하늘을 섬기듯이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모와 하늘이란 개념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유교적 차원에서는 인간사이의 관계를 인륜이라고 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천륜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효 개념을 하늘까지 확장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효의 개념을 사후에게까지 확장하고 있다. 이들은 제사를 잘 지내는 것이 효도라고 규정한다. 제사는 효의 연장이고 확장된 표현으로 본다. 신령에게 제사하는 것은 효를 넘어선 신앙의 형태이다. 동양적 효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면 천명(天命)을 따르는 윤리의 기초이며, 천인합일에 도달하는 길이고, 효는 대가족제도의 통일과 조화를 유지하는 사회적 원리이고, 국가의 안정을 이루는 정치원리였다. 후에 여기에다가 종교적 요소도 가미된 것이다.

본래 공자는 영혼불멸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별로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전통이 일반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종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적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후손이 제사지내면 조상의 혼백이 나무로 된 신주를 하나의 거처로 삼아 사후에도 얼마간 안정된 삶을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늘의 뜻에 맞기에 제사지낼 때 하늘의 복을 받게 된다는 생각이 생기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죽은 조상들이 직접 복을 주는 하늘의 신의 자리를 대치하게 되었다.

성경에 나타난 효사상

성경에서 최초의 인간관계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데서 시작된다(1:26). 즉 아담과 이브라는 부부에서 시작된다(2:21~23). 부부가 자녀를 하나 낳으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의 삼각 구도 관계가 형성되고, 그리고 더 많이 낳으면 형제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 형제들이 커서 결혼을 하여 각자 자녀를 낳으면 4, 6, 8촌 등의 친족관계가 확장되어 민족과 나라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과 점증을 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과 점증의 몫을 인간에게 맡기셔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리자(代理者)로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부여하신 문화사명혹은 문화명령이다(1:28). 문화명령의 첫 번째 부분인 생육, 번성, 충만은 특별히 가족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자녀의 생육과 번성, 충만함은 동질성 확인을 취한 정체성, 그리고 질서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이루기 위한 기본 관계들을 제시한 것이다. 문화명령은 윤리와 도덕이며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定言命令)은 항상 언제라도 이렇게 하라는 형태의 명령이며 자신의 행복 여부에 관계없이 무조건으로 반드시 이렇게 해야 된다고 명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생육 번성과 동질성 회복 그리고 평화와 번영은 가정질서에서 시작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언한 언약이다.

1:28절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아담의 후손이 장차 큰 민족으로 번성할 것에 대한 내용과, 그렇게 해서 땅위에 편만하게 흩어져 땅을 차지해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될 것과, 나아가 천지상간의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의 권한과 권위로 선히 다스리게 될 것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이런 세 가지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백성과 땅과 왕적 통치권'의 삼 요소를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효는 언약에 기초한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생물학적 근거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언약관계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래서 가족과의 관계에서 혈연적 관계의 벽을 넘지 못하면 부모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가족 간에도 하나님과의 언약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언약관계에서 부모와 자녀관계를 설정할 때,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고, 가르칠 권위를 가진다. 부모와 자녀관계는 혈연관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부여하신 가정에서 언약질서 체계이다.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가족 관계 안에서 최종적 권위가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가족들은 각자의 의견이나 꿈이나 취미나 가족의 계획이나 목적이나 물질이나 자녀나 자신까지 하나님의 뜻, 언약을 지향해야 한다.

사람들은 교회생활이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봉사와 전도가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회생활을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심하다. 그러나 언약신앙에 기초한 효신학 개념에서 보면 가족구성원을 이루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수행이 곧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언약 관계에서 책임지는 것이다. 부모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권하고 협력하고 이끌고 지도해야 할 의무와 권위가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이 교회생활에 국한되면 기독교는 지극히 개인적이 신앙, 기복적인 신앙,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신앙, 상식이 없는 기복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기초적인 단위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는 최고의 어른 위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일상사에서 실제로 인정하여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그분의 뜻을 따라 결정하고 시행해야 한다이것이 기독교 효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 가정은 언약실현의 기초단위이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 중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을 잘 요약하는 한 단어를 제시하라고 하면 성경학자들은 단연 언약이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약속”, “하나님의 나라등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학자들은 언약이라는 단어가 핵심 단어라는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장로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중심사상을 묻는 질문에 어렵지 않게 언약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장로교회가 기본신조로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에서 언약은 종교와 구원의 핵심 개념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해주는 개념이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중심사상 내지 핵심구조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과 보상은 언약의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언약을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 인간 사이에 연합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도자가 되시는 협약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연합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인간에게 복 주시기도 하고 저주하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언약을 협약”(arrangement)이란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언약이란 말은 유언이란 말로서 즉 한 사람의 유언을 선포하는 것이며, “언약이란 의미가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는 이것이 눈에 보이도록 묘사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나도 너희에게 맡기노라”(22:29). 여기에서 맡긴다란 말은 헬라어 단어를 잘 번역한 것이다. 이것의 명사형은 바로 우리가 언약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메시아적인 왕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그 아들과 협약을 맺었다. 계속해서 아들은 그의 제자들이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도록협약을 맺었다. 더 나아가 성경상의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창세기 17; 시내 산 언약-출애굽기 19장과 오경의 나머지 부분; 다윗 언약-사무엘하 7; 새 언약-히브리서 10) 모두 위에서 언급된 요소 즉,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시작하신 연합(union)을 포함하고 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사항은 계속적인 교제의 시금석이다. 아래의 것을 주목하여 보라.

 

연합(union),

축복(blessing),

저주(curse)

아브라함 언약

창세기17:4-7

창세기 17:8

창세기 17:14

시내산 언약

출애굽기 19:4

출애굽기 19:5,6

신명기 28

다윗 언약

사무엘하 7:8-9

삼하 7:10-14

사무엘하 7:14

새언약

10:19이하

히브리서 10:15

히브리서 10:26

 

성경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언약을 세우셨다. 창조사건으로부터 세상 마지막 때까지 성경 전체에서,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내적으로 일관성 있게, 점진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세계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의 언약들이 구약성경의 전체적 구조를 이루고 있고, 결국 그 언약의 완성된 형태인 신약성경의 새언약에 도달하고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개념인 언약은 강한 결속을 뜻하므로 주권적으로 시행된 피의 결속이라고 칭해졌다. 하나님은 그 언약관계의 결속을 영구화하기 위해 언약의 표징을 세우셨다. 그리고 언약의 체결이 자른다(to cut a covenant)”는 말로 표현된 것처럼 언약은 삶과 죽음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언약의 핵심주제는 한마디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표현된다. 이 특별한 언약관계가 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다. 실제로 종교(religion)란 하나님과의 관계개념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도 언약 관계가 이스라엘 종교의 성격을 규명하였고, 이스라엘의 특징적인 삶의 양식을 정형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 사상의 종개념즉 가장 큰 줄기 개념은 계약사상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 사상이다. 이것을 신약성서, 구약성서이다. 신약과 구약의 약()이란 계약을 뜻한다. 쉬운 말로 하면 약속이다. 히브리어로 베리토(Berito)이고, 그리스어로 디아테베(Diatebe), 라틴어로 테스타멘툼, 영어로 테스타먼트(Testament)이다. 신약 구약이 나타내듯이 성서는 신약이 나타내듯이 성서는 신약과 구약의 계약이란 큰 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계약에는 보통 네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호계약-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약속

상하계약-윗사람이 아랫사람과 맺는 약속

보호계약-약자를 돌보아 주는 일방약속

이행계약-조건과 입장에 관계없는 약속

 

성서에 나타난 언약은 상하계약에 속하는 것이다. 위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는 것임에 비해 아랫사람이 충성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성서에서 이것을 신앙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충성심이나 신심과는 다르다. 위에서 내린 약속이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절대로 지켜야 한다.

하나님과의 상하계약이란 아주 특이한 종교사상이다. 어떤 종교에서도 이 같은 약속의 형식으로 시작되어 신앙체계는 없다. 그래서 성서의 종교를 계약 종교라고 부른다.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 계약, 이삭계약, 야곱 계약의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성문화된 계약은 모세의 십계명 계약이라고 부르는 시내산 계약이 그 첫 번째이다. 시내산에서 이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약속이다.

 

(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15: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15: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15: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15: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15: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5: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15: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15: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15:32-40]

두 계명으로 압축한 십계명을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한 계명으로 압축하여 그의 몸으로 다 성취하셨다.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와 같이 계약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과 사랑의 법을 모두 다 성취하셨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 계약 사상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계약 사상이 성서의 핵심 사상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계약신앙의 목적이 무엇일까?

여호와 신앙은 사막지방에서 태어났다. 대체적으로 어떤 사상과 풍습은 어떤 특정 지역에서 생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음악은 태양이 작열하는 낭만적인 이태리에서, 우울한 지역인 독일에서 철학이, 배고픈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생긴 것을 보면 환경을 떠나서 어떤 사상적 태동하여 성장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믿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신기루의 사막에서 유일 절대신 계약 사상이 태어난 것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막에서는 이런 사상이 왜 나오지 않았을까? 인간이 최고의 가치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 수없이 많은데 계약 사상이 성서의 기본 신앙이 되어 있는 것은 아주 특이하다.

 

계약사상과 신명기

계약사상이 노아와 아브라함 시대부터 시작했다고 하지만 쌍방 간의 책임과 권리를 분명히 한 곳은 아주 후일인 신명기 시대이다. 신명기는 단순히 모세가 기록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가 기록한 네 권의 책의 핵심 내용을 미래를 위해 용해하여 잘 정리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의 사상은 가장 종합적이고 선명하고도 가장 확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신명기에서 계약사상의 몸체가 확실히 들어나 있어 그 계약의 책임 이행과 권리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 준다.

 

(30: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3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명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계약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자의적 축복의 계약이다. 그러나 일단 체결된 계약협약을 이행치 않으면 상당한 벌칙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그 약속을 이행하면 천하의 존귀와 복을 얻는다.

시내계약 즉 십계명 계약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계약자의 자기소개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 여호와라이어서 과거에 베푼 은혜를 설명한다. “너희들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 로라로 이어진다. 이어서 계약조항 1조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조까지 계약자인 신에 관한 것과 그 다음 10조까지는 인간을 향한 계율이다. 도합 10개의 계약조항을 두 개의 돌에 새겨진 계약 석이 증거로 주어진다. 이러한 신인계약, 전능의 신이 하잘 것 없는 인간과 맺는 계약사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학설은 구구하다.

이 계약의 특성은 피 계약자인 인간의 생활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절대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저주 사망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규범은 절대가 된다. 인간은 이유 없이 절대적으로 이 법을 지켜야 한다. 황량한 사막에서 나온 외마디 소리 같은 이 계약이 혁명의 핵이 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신통한 불가사의다. 이 계약의 핵심은 죽지 않기 위해선 자신을 처서 이법에 복종해야 한다.

철학자 부버(Martin Buber)는 인간의 역사를 만남의 연속이라고 정의했다. 만남을 통해 인생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축복도 저주도 받은 것인즉 이 땅의 역사의 속성은 만남이라고 했다 그렇다 역사도 그렇고 인생도 그러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그 만남 속에서 계약이 이루어지고 그 계약 속에서 인간의 성장이 약속되고 영원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신구약 전체의 핵심흐름과 역사의 중추적 의미 그리고 인간 삶의 깊은 뜻은 전부 만남의 계약에서 이루어진다고 성서는 보았다.

 

계약사상의 내용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성서의 핵심사상은 계약 혹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했다. 십계명은 단지 출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파기된 계약 관계를 갱신함으로써 깨어진 규정으로서 의식적인 국면을 강조한 본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대하 같은 계약사상의 내용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나님과 인간이 계약을 했는가? 갱신을 통해서 세상 끝 날까지 영원할 수 있는 모세의 시내산 계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계약의 내용이 영원하다고까지 천명한 그 계약의 실제적 내용이 무엇이 길래 영원하다고까지 했는가?

계약 내용(contents)을 살펴보자. 십계명으로 압축된 시내산 계약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반부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무엇을 말하는가?(What to believe)이고 후반부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어떻게 살 것인가(How to live)를 가르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육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하면서 살아가느냐에 있다.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것, 이것을 단순한 믿음의 문제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3-6].

 

인간의 큰 악은 전부 이 신념의 문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계명의 가장 앞자리에 두고서 강조한 것이다. 시내계명의 후반부에 속하는 ‘'How. to live"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인간과 그 사회와의 관계요, 인간과의 관계 문제이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 가르친다. 이 땅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 역시 하늘 신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태도로서 하나님이 만든 인간과 우주만물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How to live”는 엄격히 말해서 “How to believe”의 세칙에 속한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써 그가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여호와를 믿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5계명에서 l0계명까지의 내용이다. 여호와만을 섬기고 사랑하는 자는 결단코 무례하지 않고 결단코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지 않고 결단코 거짓말도 하지 않고, 그리고 결단코 간음도, 도둑질도 하지 않고, 독재를 하면서 살지도 않는다. 5계명에서 10계명까지의 계명 하나하나를 뜯어 살펴보면 여섯 개의 세칙이지만 내용은 여호와를 믿는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새 가지요 열매일 뿐이다.

시내계약의 핵심은 인간 생명의 존귀, 인간평등의 사상 그리고 영원한 평화의 사상이 유일신 하나님의 믿음의 바람 위에서만 가능하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본주의적 바탕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 세상 만민이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량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실상은 같은 것이다. 사람뿐이 아니라 짐승들 그리고 산하에 있는 나무와 땅까지도 아가페 사랑으로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 시내계약의 핵심이다. 따라서 시내계약의 핵심은 이 땅에 사는 인간이 굉장한 수준을 격상시킬 수 있는 고등윤리 속에서 살면서 신의 경지까지를 흠모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천재성과 불굴의 노력과 능력이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내계약인 십계명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약속이 있는 첫 계명

모세는 하나님께서 제1세대 이스라엘에게 제5계명을 명령하신 사실을 굳이 들추어내며 부모를 공경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세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어 그곳에서 장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있다는 상징으로 이 사실을 역사 앞에 나타내어야 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1-3)고 재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직 약속의 땅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는 복을 주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해석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가나안 땅은 여호와께서 준 땅이 아니다. 때문에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로 바꾸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의미를 기억하여 장차 영원히 여호와께서 주실 기업에 참여되어 있다는 복된 사실을 마음껏 누리도록 돕고 있다. 따라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은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지만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영적으로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고 누리는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바울은 제5계명을 재해석하면서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고 누림에 있어 그 사실을 확증하는 유일하고 중요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자녀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자녀에 대한 동일한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고 요구한다.

 

3. 새언약공동체의 가정과 교육 

신약에 와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새로운 가족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인이 혈연적 가족관계를 넘어 새로운 언약공동체가 출현한다. 그리스도인 가족은 언약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가정생활이라는 것은 가족을 책임지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이웃을 책임지는 일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서로 권하고 이끌고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가 곧 신앙생활이자 가정생활이다.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가족 중 누구의 의견이든지 단호히 거절해야한다. 왜냐하면 가정은 언약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족공동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언약을 세우시고 바로 그 언약세대를 이어 모든 가문과 전 열방에 전달되기를 원하신다. 맨 처음 아담에게 주신 언약, 노아와 그 가족에게 주신 언약,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생명의 언약이며 동시에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한 축복의 언약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언약이 지켜지지 않고 전수되지 않을 때에 개인과 이스라엘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담이 언약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이때에 죄가 이 땅에 들어오고 가정에 형제간에 살육 사건이 벌어지고 아브라함 또한 언약이 희미해짐으로 가족 간에 불화로 인해서 이스마엘을 떠나보내야 하고, 이스라엘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불순종하여 죄에 빠진 인간들에게 오셔서 새언약을 맺으셨고 회복의 길을 열어 주셨다. 누구든지 이 새 언약에 들어오는 자는 이 땅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불순종하는 자는 영벌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가정은 언약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언약을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기를 원하신다.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자발적인 순종의 공동체, 상호신뢰를 통한 사랑의 공동체, 식탁을 통한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가장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곳이다.

새언약에서도 가정에서의 언약 교육의 중요성은 약화되지 않았다. 물론 신약성경에는 직접적인 가정교육에 대한 가르침이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가정보다 더 발전적인 큰 기관인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마치 큰 가족공동체와 같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2:31-35절에 나오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서 예수를 불러내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예수는 즉시 맞이하러 나오기는 커녕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하였다. 이 말만 보면, 예수는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와 가족을 자기와 상관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예수는 왜 그렇게 말한 것인가?

먼저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으면 바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사람을 시켜서 불러내려고 한 것이 좀 이상하다. 이런 의문은 앞의 21절을 보면 어느 정도 풀리는데, 거기에는 예수의 가족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선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들은 좋은 마음으로 예수를 지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위험하거나 불순한 운동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말리러 온 것이다. 마치 대학교 가서 데모에 참여하는 아들을 찾아온 부모가 데모 현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교문 밖에서 아들만 불러내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예수가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고 말한 것은 다소 냉정하게 들리기는 해도, 가족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는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그 다음 구절들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4-35, 표준새번역). 이 구절을 개역성경에서는 좀 달리 번역하였다.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4-35). 두 개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개역성경을 보면, 마치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저 청중들일 뿐이고, 예수는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자기의 모친이요 동생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표준새번역 성경을 보면, 예수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개역성경보다 표준새번역이 훨씬 더 정확한 번역이다. 예수는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흔히 무리로 번역이 되는 오클로스(ochlos). 그들은 가난하거나 굶주린 사람들이며 일정한 거처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그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것은, 혈연을 넘어설 뿐 아니라, 권위 중심, 재산 중심이던 당시의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단숨에 깨뜨려버리는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마태 기자가 이 구절을 변경시킨 데서 알 수 있다. 마태 기자는 예수가 이 선언을 무리를 가리켜서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켜서 한 것처럼 고쳤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예수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그 말을 했다고 하였다(12:49). 누가 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라는 구절을 아예 삭제해버렸다. 그리하여 예수가 무리를 가족과 동일시했다는 논란 자체가 일어날 수 없게 하였다(8:21). 물론, 이처럼 파격적인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마가의 본문이 가장 역사의 예수에게 가까운 것이다.

학자들은 맨 끝에 나오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는 구절(35)과 그 앞에 나오는 전체 이야기(31-34)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요약하자면, 말씀을 중시하는 불트만 같은 학자는 끝 구절만이 예수의 말씀이고 앞의 이야기는 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따르면,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듯한 끝 구절만 중요하고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파격적인 내용은 지어낸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보다 일을 중시하는 디벨리우스 같은 학자는 앞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그것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를 따르면, 예수의 파격적인 선언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부연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끝 구절(35)가르’(gar=왜냐하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는 그것이 앞에 나온 선언의 이유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디벨리우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위의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어느 정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정하는 냉정한 말도, 어떤 조건을 갖춘 막연한 대상을 가정하여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떠도는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개념을 확장함과 동시에 동일시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선언하는 것이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부모라도 초라한 모습이면 모른 척하려고 하는데, 예수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초라한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된 하나님의 가족이며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하는 권력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예수는 이런 종속적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부모로 받아들이고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이다. 당시의 로마법에서 가부장의 권위는 매우 강화되었다고 한다. 로마 사회에서 가장은 흔히 세 가지 권위를 가졌다. 첫째는 자녀와 손자들 그리고 종들에 대한 권위요, 둘째는 그의 재산에 대한 권위요, 셋째는 그의 부인과 며느리들에 대한 권위이다. 그들은 철저히 가부장적 구조 속에 있었고 그 정점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황제를 주인”(kyrios) 즉 가장으로 모시는 황제의 가족들이었다. 가장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의미하기보다는 가족의 권위자를 의미했다. 가족은 친족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존과 종속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이미 그들도 혈연을 넘어선 가족을 생각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혈연을 넘어서는 사랑의 가족이 아니라 혈연을 넘어서까지 종속되는 더욱 철저한 가부장제라 할 수 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라는 남자와 삽비라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이 사람들은 부부이다. 이 부부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류 최초의 공동체가 남녀였듯이, 이들은 언약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남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갑작스레 비명횡사(非命橫死)한다. 이들이 이렇게 숨진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격려의 아들, 바나바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언약 공동체에 내놓았다. 이 사건을 바로 이어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도 자신들의 땅을 팔아서 언약 공동체에 내놓을 생각을 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지만,

이 일이 언약 공동체에 소속된 가족들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언약 공동체는 의무나 책임으로 일하지 않는다. 성막을 지을 때와 같이 자원하는 맘으로 움직였듯, 언약 공동체는 자유로운 섬김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 부부는, 바나바의 명성이 부러웠든지, 아니면 자신들도 뭔가 마음이 움직였든지, 어떤 이유로 해서, 땅을 팔아 내놓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나니아는 땅 판 돈을 감추고, 그 일부만을 언약 공동체에 가져온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한다. "아나니아! 어찌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거룩한 숨결을 속이고, 땅 값의 얼마를 남몰래 감추었소? 팔리기 전에도 당신 땅이었고, 팔린 뒤에도 당신의 권한아래 있던 것을, 어찌 당신 마음에 이런 문제로 두어, 사람에게 거짓말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하게 되었소?" 아나니아, 삽비라가 갑자기 죽은 것은, 언약 공동체를 깨뜨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가 회복되는 그 중요한 시기에, 이들은 사탄이 되었다. 사탄은 달리 사탄이 아니다. 거룩한 숨결을 속여, 언약 공동체를 마비시키려 하는 것이 사탄인 것이다.

이어서 사도행전 6장에는 그러한 날들 속에서 배우려는 이들은 더 많아졌는데, 희랍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을 향해 불평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속한 과부들이 매일의 구호 음식 받는 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둘의 보냄 받은 이들은 모든 배우려는 이들을 불러 말했다.” 언약 공동체가 그 동네 과부들을 모두 먹여 살렸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회 최하층 민이었던 과부를 살려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는 과정 속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는 사람을 돕기에 더 수월했으리라 생각한다. 히브리말을 쓰는 과부들은 구호음식을 제때 제때 받았는데, 희랍 말을 쓰는 과부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보냄 받은 이, 즉 사도들은 배우려는 모든 사람들, 즉 모든 제자들을 불렀다. 언약 공동체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할까요? 그러나 언약 공동체를 보라. 이끄는 자들이 강제로 무언가를 명령을 내린 것인가? 아니면, 따르는 자들이 이끄는 자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것인가? 언약 공동체는 군주제일 수 없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언약 공동체가 민주제일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의 의견보다 더 중요한 의견이 있다. 따라서 언약 공동체는 '군주제 + 민주제'이다. 한 분의 군주, 아버지가 계신다. 그럼에도 우리를 자기 목숨 내어놓을 만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온 땅의 절대적인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예수의 이런 새로운 가족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로운 가부장주의로 발전시켰다. 아마도 그는 초대교회가 현실적으로 당시의 가부장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초대교회가 일반적 가부장주의에 머물지 않고 예수의 파격적 가족의 의미를 살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를 가장으로 하는 황제의 가족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님의 가족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4:6). 이런 관계는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도 적용이 된다. 바울은 신도들에게 내가 여러분을 낳았다고 하며,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그들을 대한다고 한다(고전 4:15; 살전 2:11). 오네시모나 동역자 디모데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또 동역자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도 된다고 한다(10; 2:22; 16:13).

바울은 가부장제라는 틀은 유지하면서도 다만 가장을 황제 대신 하나님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라는 학자는 이것을 사랑의 가부장주의라고 부른다.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파격성은 가부장제라는 틀 속으로 들어와서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핵심은 살아 있다 하겠다. 오늘날의 교회에게 바울의 교회는 하나의 모델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모델은 역시 예수의 파격적인 사랑의 가족이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런 사랑의 가족을 늘 새로운 상황에서 이룩해가는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많은 초대 교회들은 가정에서 형성되고 발전하고 확대된 공동체였다. 많은 경우 가족 단위로 세례를 받아 새 언약의 관계 안에 들어왔으며, 그 이후 새언약의 결속은 후손들에 대한 유아 세례로 지속되었다. 물론 새언약은 혈연관계의 제한을 넘어 신앙을 근본적 기초로 간주함으로써 그 적용 범위를 크게 확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혈연적 관계는 새언약에서도 무시되거나 해체되지 않는다. 신앙의 기초에서 새언약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결혼관계를 통해 다시 그리스도인의 가족을 형성하였다. 그 때 그 가정은 새언약의 믿음을 통하여 혈연관계를 단위로 결속된 언약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자녀에게 주어진 대표적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계명에 따라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것이었고, 부모에게는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었다(6:1-4). 율법을 그 완성된 의미에서 재해석한 새언약의 가르침이 신약성경에서는 자녀 교육의 내용이 되었다. 따라서 교육 내용인 율법은 구약 시대보다 더 광범위하고, 완전하며 충만한 의미의 복음으로 발전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관계로 더 풍성해졌다. 그리고 사랑을 통한 훈계 방법으로 새언약의 교육을 지속해야 할 책임은 여전히 부모에게 위탁되어 있었다

 

4. 나가는 말

사무엘 가정이나, 모세 가정, 다윗 가정, 그리고 야곱의 가정은 물론 아브라함 가정, 심지어 예수님이나 바울사도까지도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성경적 가족이라든가 가정에 대한 좋은 모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고 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하여 우리가 바라보고 따를 온전한 모델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아브라함을 본받자"라는 식의 설교를 하지만, 어떤 사람의 훌륭한 면이나 교훈은 본받을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을 온전히 본받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온전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 공동체로서의 가족에 대해서도 어떤 모델을 통해서 배우기보다는 비판적 대상들에서 성경적 가족에 대하여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성경적으로 가정개념은 성전(Holy Temple)’의 개념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2:18-24). 여기에서 최초의 남자와 여자인 아담과 하와가 이룬 가정이 최초(Divine Origin)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적 기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가정도 함께 만드셨다. 가정은 두 사람이 부모를 떠나 즉 독립해서 애정과 책임을 수반한 인격적, 육체적 연합을 이룸으로서 형성되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다. 가정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훨씬 전에 형성된 신앙공동체 즉 언약공동체였다.

하나님은 가족공동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언약을 세우시고 바로 그 언약세대를 이어 모든 가문과 전 열방에 전달되기를 원하신다. 맨 처음 아담에게 주신 언약, 노아와 그 가족에게 주신 언약,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생명의 언약이며 동시에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한 축복의 언약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언약이 지켜지지 않고 전수되지 않을 때에 개인과 이스라엘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담이 언약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이때에 죄가 이 땅에 들어오고 가정에 형제간에 살육 사건이 벌어지고 아브라함 또한 언약이 희미해짐으로 가족 간에 불화로 인해서 이스마엘을 떠나보내야 하고, 이스라엘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새로운 가족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가족개념은 혈연적 가족관계를 넘어 새로운 언약공동체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족은 언약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 성격을 분명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가정은 언약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언약을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기를 원하신다.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자발적인 순종의 공동체, 상호신뢰를 통한 사랑의 공동체, 식탁을 통한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가정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곳이다.

그러면 성전인 가정에서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성전인 가정에서 제사장이 되는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리고 자녀는 아버지를 어떤 존재로 인식해야 하는가? 제사장인 아버지는 4가지 역할이 있는데 아버지 역할 네 가지를 요약하면, 부모는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낳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그 생명을 양육하고, 하나님과 함께 그에게 말씀을 전수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성품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 효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효는 단순한 가정윤리 개념을 초월한다. 기독교 효는 하나님의 나라와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효의 출발점은 가정이며 더 나가서 신약공동체, 교회는 이를 확장하여 구현한다.

언약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가정생활이라는 것은 가족을 책임지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이웃을 책임지는 일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서로 권하고 이끌고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가 곧 신앙생활이자 가정생활이다. 그래서 핵가족이나 동성결혼, 산아제한과 같이 문화명령에 위배하는 것들, 즉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가족 중 누구의 의견이든지, 세상의 어떤 가르침이든지 단호히 거절해야한다. 왜냐하면 가정은 언약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전통파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이란 넓은 범위의 공동체이다. 즉 아이들과 며느리들,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 손자손녀들, , 외국인, 하인들과 그 하인들의 가족들까지도 모두 가족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통하여 조성되어진 이스라엘 인들의 삶의 형태이며 성격이다. 이들이 대가족제도를 갖게 된 것은 경제적 이유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이유에서이다. 가족의 결속은 아버지를 중심한 조직과 가족 서로간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상호작용의 원칙을 적용함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종교적인 공동사회로서 가족은 과거의 전통을 보존하여 이를 교육과 예배를 통하여 후손에 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오토(Otto Baab)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부르는 것보다 신앙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유교사상에서 효는 가정 개념에서 덕을 중시한 왕도정치의 이데올로기로, 더 나가서 죽음에 대한 유교의 독특한 이해와 연결되어 부모생존시의 효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조상숭배인 제사로 확장하게 되었다. 사후에 대한 유교의 사상은 인간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갈라져 백은 땅으로 들어가고 혼만이 위로 올라가는데 정당한 제사는 이 혼과 백을 합하는 극치를 이루어 죽은 자의 여생을 당분간 이나마 연장시키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제사가 끊어지면 조상들은 주로 죽는다는 생각은 천주교가 면죄부를 팔기 위해서 기독교를 연옥설로 정치적 이데올로기화시키는 것과 동일한 하나의 단면을 보아야 한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는 우리의 삶을 이끌던 올바른 가치관들을 깊은 혼돈에 빠뜨리는 엄혹한 현실을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래적인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가정의 본래적인 가치를 회복함으로 세대주의적인 문제에 근원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효란 간단히 하나님()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6:1-4).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연장하고 확장해 나감에 있어 수직적인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일정한 목적을 두고 직선적으로 진행하며 발전해 나간다는 커다란 속성을 표시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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