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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이상욱 201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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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32:27-28

 

다른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거북이는 신비하기만 하다. 태어 난지 몇 분도 되지 않은 새끼 거북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아는 것처럼, 저 멀리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빛의 파장을 따라 바다를 향해 힘차게 나아간다. 새끼 거북이의 인생 여정은 어미 거북이에서부터 출발 한다.

어미 거북이가 바다를 횡단해 자신의 고향 해안까지 헤엄쳐오는 여정은 매순간 죽음과의 사투다. 호시탐탐 상어와 고래가 노리고 있고, 인간이라는 동물이 막강한 무기로 언제든 자신들을 포획해 죽일 수 있다. 어미 거북이는 바다의 파고가 제일 높고 여름 중 가장 뜨거운 날 헤엄치기 시작해 자신이 태어난 땅 해변에 도착한다. 5-6주 전에 임신한 알을 낳으러 가는 것이다. 이는 거북이의 삶에 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므로 그들은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바닷가에 도착해 바닷물이 닿지 않도록 해안으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모래사장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어미 거북이는 깊게 구덩이를 판 뒤 그곳에 50-200개의 알을 낳는다. 그러고는 곧바로 모래로 둥지를 덮어놓는다. 맹금류로부터 알을 보호하고, 점액이 마르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세 시간여 동안 이 모든 일을 마친 어미 거북이는 다시 바다로 향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뒤 후회 없이 다시 바다로 떠나는 것이다.

2개월 정도 지나면 모래 속에 낳아 놓은 알들이 깨지기 시작한다. 신비롭게도 새끼 거북이는 갈 속에서도 자신의 생손을 위한 무기를 만든다. 카벙클(carbuncle)’이라는 임시치아(臨時屬牙)가 바로 그 무기다. 새끼들은 카벙클로 알의 내벽을 깨기 시작한다. 이 벽을 깨지 못하면 새끼 거북이는 빛 한번 보지 못한 채 살다가 그 안에서 죽을 것이다.

새끼 거북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알을 깨느라 카벙클이 부러져 피가 난 새끼 거북이를 맞이하는 것은 아빠 거북이도 엄마 거북이도 아니다. 어미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덮어 놓고 간 30센티미터 두께의 모래다. 어미 거북이가 얼마나 단단하게 다져놓았는지 이 모래성은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새끼 거북들이 이 모래를 뚫고 나오기까지는 무려 3일에서 7일이나 걸린다. 이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지 새끼 거북이의 몸무게는 알을 깨고 나올 때에 비해 30퍼센트 정도 줄어든다.

그럼에도 새끼 거북이들은 섣불리 모래 표면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모래 위에는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다른 동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새끼 거북이들은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다 한밤중이 되어 서야 운명의 질주를 시작한다. 한순간에 쏟아져 나온 새끼 거북이 들은 자석 컴퍼스라는 본능적인 감지 장치에 따라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향해 일제히 움직인다. 바다에 도착하기까지의 이 과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은 질주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새끼 거북이들 은 바다라는 생명을 만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질주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바다는 새끼 거북이에게는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다. 새끼 거북이는 바다에 입수해서 48시간 동안 미친 듯이 수영을 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다의 가장 밑바닥이다. 이곳에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큰 물고기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바다거북이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야곱의 과거

자신의 카벙클로 자신의 유일한 삶의 터전인 알을 깨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보호막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멈추게 하고 결국 그 안에서 자신을 질식하게 하는 알이라고 깨달은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야곱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주의 한 공간에 던져진 채 그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형성된 세계관을 옳은 것이라 착각하며 그 안에 안주해버린다. 대다수는 그것이 자기 나름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극소수의 인간은 자신이 던져진 그 환경이 출구 없는 알이라고 절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천재로 불릴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다. 천재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을 깨고,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자신 만의 여정을 떠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키고 안주하게 만드는 타성에 젖은 자아를 직시하며, 그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과 대면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고,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는다. 먼저 나온 아이는 몸이 붉고 털이 많아 이름을 에서라 지었고, 뒤의 동생은 쌍둥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이름을 발뒤꿈치라는 뜻의 야곱이라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야곱은 2인자이자 에서의 동생이며 꼴찌였다. 그의 이름은 얌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호시탐탐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자였다. 아직도 알을 깨지 못하고 그 안이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새끼 거북이와 같은 존재였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다. 에서가 사냥해서 가져다주는 음식이 늙은 이삭에겐 최고의 즐거움이었고, 재산 상속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에서에게 주기로 오래전부터 결심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의 치마폭에 싸여 있는 야곱을 항상 못 마땅하게 여겼다. 리브가는 모든 일을 뒤에서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에서만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편애로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야곱이 어느 날 집에서 죽을 쑤고 있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형 에서가 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야곱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만일 형이 장자 권을 포기하면 음식을 주리다!”라고하며 형의 마음을 떠 본다. 에서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자신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다. 야곱은 그날 죽 한 그릇으로 장자로서 가져야 할 명분을 획득했다.

눈이 침침해져 점점 보이지 않게 된 이삭은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권한을 에서에게 넘기고자 그에게 마지막으로 사슴을 사냥해 요리를 만들어오라고 명령한다. 자신의 재산을 관례에 따라 맏아들인 에서에게 넘겨주려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다.

 

희생 제사 의식의 의미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이러한 의식을 치렀다. <창세기> 15장에서 신은 아브라함에게 공식적인 계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한다. 이 계약은 결국 아브라함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자아와의 약속이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3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3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신과의 합일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희생 제물을 준비한다. 신의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마지막으로 서로 맺은 계약을 파기하지 말자는 의례를 행한다. 이 의례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승화된 상태, 세상에 태어날 때와 같은 순수한 상태에서 가능하다. 이를 깊은 잠이라한다.

저녁이 다가와 아브라함은 자신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거룩한 경지로 진입한다. 이 상태를 히브리어로 타르데마(tardemah)’라 한다. 타르데마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지방이다. 이 경험을 통해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빠진다. 이 잠은 일상의 잠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타르데마에서 현재의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신을 보게 된다. 성서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중간 단계인 터부를 어둡고 강력한 공포로 표현한다. 아브라함은 이 공포 안에서 헤매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 경험을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할 불굴의 용기와 지혜들 얻는다.

신이 등장한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린다.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놓은 희생 제물 사이로 지나간다. 불이 반으로 잘린 희생물 사이로 지나가는 행위는 오래된 희생 제사 의식이다. 고대 근동의 희생 제사 의식에서는 둘로 잘린 고깃덩어리 사이로 계약 당사자들이 걸어간다. 이는 만일 한쪽이 계약을 파기하면 이 잘린 동물의 꼴이 될 것이라는 암묵적인 발언 이다.

동물을 잡아와 별미를 만들어 함께 먹는 행위를 계약이라 한다. 계약의 히브리어 표현인 버리쓰(berith)’잘라진 것이라는 의미 인데, 바로 이 고기를 차르다라는 뜻이다. 계약 당사자들은 계약 체결을 축하하기 위해 잘린 희생 동물을 요리해 먹는다. ‘식사가 계약의 완결인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희생 제사 의식을 혐오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3일 동안 사막을 걸어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 끔찍한 번체가 아인 약식으로 계약을 체결하려 한다. 그는 이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늙어 계약 체결을 위한 의례에 필수 요소인 타르데마도 생략한다. 그는 맏아들 에서가 잡아온 사냥감을 요리해 먹는 것으로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엿들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에서가 사슴 사냥을 하러 간 사이 야곱을 부추겨 눈먼 이삭을 속일 음모를 꾸민다. 리브가는 오랫동안 에서를 관찰한 결과 그가 가문의 대를 이을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녀는 야곱을 장자로 등극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겉으로는 유약해보여도 훈련을 통해 살아남을 최후의 새끼 거북이는 야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털이 많은 에서로 변장시키기 위해 그에게 동물 가죽을 뒤집어씌운 뒤 자신이 만든 음식과 함께 이삭에게 보낸다. 이삭의 입맛은 누구보다도 리브가가 잘 알고 있었다.

이삭은 그가 에서가 아니라 가죽을 덮어 쓰고 들어온 야곱임을 알아차리지만 짐짓 모른 척 행동한다. 그 순간 이삭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어져온 신앙의 유산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 성취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삭은 모른 척하고 야곱의 음식을 받은 뒤 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웠다. 장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브가는 즉시 야곱을 자신의 오빠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 땅으로 피신시킨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야곱을 죽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스무 살 야곱의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이 시작된다.

 

절망에서 빠져 나올 사다리

야곱은 집을 떠나 친척들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가던 중 한 장소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베게도 없어 넓적한 돌 하나를 주워 베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막한 밥은 야곱의 근심과 걱정을 배가시켰다.

야곱은 이 무명의 장소에서 꿈을 꾼다. 그는 꿈에서 땅에 충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것을 보았다. 충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술람(sullam)’은 성서 전체에 단 한 번 등장한다. 술람은 흔히 사다리로 번역되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라는 독특한 신전 구조를 통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추적할 수 있다.

지구라트는 고대 근동 인들이 지은 신전 이름이다. 수메르인, 아카드인, 엘람인, 바벨로니아인 그리고 아시리아 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안식처를 건축한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직사각형의 플랫폼을 만들고 그 위에 점점 작은 직사각형의 건물을 올려놓는 것으로 지구라트라는 단어 자체가 한없이 쌓아올린 건물이라는 의미다.

돌이 없는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지구라트 전체를 진흙 벽돌을 구워 쌓아올렸고, 맨 위에는 레바논에서 수입한 백양목으로 제사를 지내는 지성소를 만들어 올렸다. 이곳은 그 도시의 사제만이 들어 가 잘 수 있는 장소다. 특히 신년이 되면 왕이 이곳에서 거룩한 여인혹은 신에게 주어진 여인이라 불리는 진전 창기와 히에로스 가포스(hieros gamos)’라는 성혼 례를 올려 도시의 풍요를 비는 의례를 거행한다. 사제는 지구라트 정변에 놓인 계단을 밟고 맨 위의 지성소로 올라간다.

지구라트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나 파라미드처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 땅에 사는 인간이 하늘로 오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계단을 아카드어로 심밀투(simmiitu)’라 하며, 이 계단을 통해 인간은 신을 만나 하나가 된다. 야곱이 본 층계인 술람이 바로 이 심밀투다. 성서 저자는 분명히 바벨론의 지구라트와 그 중앙 계단인 심밀투를 알고 있었고, 그 단어를 차용해 히브리어 술람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 층계는 땅에 굳건히 박혀 있고 그 끝이 하늘에 닿아 있다. 이 장면은 야곱의 인생을 뒤흔든다. 이 장면은 땅과 하늘이 하나라는 메타포다. 기존 종교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는 종교와 사제라는 사실을 줄기차제 설교 해왔다. 하늘과 땅이, 신과 인간이, 개인과 이웃이 하나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기성 종교에 피해 이단으로 낙인찍혀 죽음당하거나 축출을 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간이 예수다.

 

술람은 사기꾼이자 겁쟁이였던 야곱을 한순간에 헌화시킨다. 야곱은 마치 새끼 거북이가 카벙클로 자신이 안주하던 잠자리를 부수듯이 익숙함, 전통, 편견, 눈치, 대의명분이라는 자신이 안주하던 알과 같은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신이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우리의 영적인 단계가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기반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재인식이다. 야곱이 잠을 잔 곳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초략한 땅이다. 야곱은 바로 그 장소가 신이 계신 곳임을 깨닫는다.

야곱은 이 공간에 들어서서 자신이 해야 할 소명을 듣게 된다. 우리는 종종 이 공간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쓴다. 터부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거부 한 채,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가기 십상이다. 이 목소리는 설명이나 이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환각이나 망상과는 다르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야곱은 바로 그 무명의 장소가 하늘로 들어가는 문임을 깨닫는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자아를 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알게 모르게 습득한 지식을 버리려면 그 지식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에게 하는 이 질문은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자에게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베헤모스(괴물).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려면 질문이 필요하며,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전적으로 의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깨달은 야곱은 꿈을 꿨던 무명의 장소를 베델(Bethel)’, 신이 계신 장소라 명했다. 야곱은 자신 앞에 펼쳐질 세상이 험하다 할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며, 저마다의 삶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신은 이러한 야곱에게 절망에서 빠져나올 술람을 선사한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술람은 홍수 이후 신이 노아에게 선사한 무지개와 유사하다. 술람의 끝은 하늘을 향해 있어서 볼 수 없지만, 반대편 끝은 지상에 박혀 있다.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매일 지상에서의 어려운 상황의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가야 한다. 야곱은 사다리의 첫 가로대에 올라선다.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추구했던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겁쟁이 야곱의 귀향

야곱은 한밤에 베델에서 신을 만나는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지만 아침이 되자 다시 혼자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떠나야 했다. 어느 날 야곱은 들판에서 우물 하나를 발견한다. 해가 저물자 몇몇 목동이 몰려와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입구를 다시 돌로 막았다. 야곱이 그들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그들은 하란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야곱은 마침내 삼촌이 사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야곱이 혹시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십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잘 압니다. 저기 라반의 딸 라헬이 기축과 함께 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야곱은 우물을 향해 오고 있는 라헬을 보고는 우물로 달려 가 입구를 막고 있는 육중한 돌을 다시 밀어내 라헬의 양 떼에게 물을 주었다. 야곱은 사촌 여동생 라헬의 커다란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라헬의 눈과 목선에서 자신의 어머니 리브가의 모습을 보았다. 야곱은 라헬을 보는 순간 그녀의 침묵이 자신의 침묵이며, 그녀의 눈이 자신의 눈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라헬 역시 야곱을 보고 그의 어린 시절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어보았다.

이들은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곁에 있던 연인 같았다. 야곱은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는 소리 높여 울었다. 그는 자신이 라반의 여동생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과거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 바로 이곳에서 이삭의 부인 리브가를 발견한 것처럼, 수십 년이 지나 바로 이곳에서 야곱 또한 자신의 부인이 될 라헬을 발견한 것이다. 라반은 야곱을 반갑게 맞이했고 그는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삼촌 라반은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다. 친척임에도 야곱의 노동력을 이용해 재산을 불릴 셈이었다. 라반은 야곱이 라헬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을 알고는 계약을 유도했다. 그는 야곱에게 7년간 일을 하면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한한다. 사량에 빠진 야곱은 성실하게 일해 약속한 7년을 채운 뒤 라반에게 라헬과의 혼인을 허락해달 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라반은 혼인 잔치를 열어준다. 밤이 되어 하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술에 취한 야곱은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 신방으로 향했다. 7년간의 노동을 뒤로하고 비로소 첫날밤을 치른 것이다.

동이 트고 야곱이 눈을 떴다. 그런데 옆에 라헬이 아닌 라헬의 언니 레아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서로를 보고 놀라 말문이 막혔다. 야곱은 불행의 환영이 그를 덮쳤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연정과 술기운에 사로잡혀 낯선 여인에게 자신의 몸과 영혼을 드러낸 것이다. 레아 역시 야곱과 함께 라반의 계략에 농락당한 희생물이었다. 야곱은 신방에서 뛰어 나와 라반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한다.

 

(29: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그러나 라반은 미안한 기색 따위는 없었다. 그는 장사꾼처럼 말 한다.

 

[29:26-29:27]

(29:26)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29:27) 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야곱은 화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라헬에 대한 사량이 삼촌을 향한 복수심보다 컸기 때문이다. 야곱은 또다시 7년 동안 일을 해주고 결국 라헬을 얻었다.

이후 야곱은 사업에 성공한다. 부인 두 명과 첩 두 명까지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살지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이 한 가지는 야곱의 삶 전체를 사로잡고, 매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어미 거북이가 산란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야곱 역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야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괴물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형 에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가슴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자기 자신 야곱이라는 괴물이다.

야곱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타향에서 결혼한 두 명의 아내, 레아와 라헬을 설득해야 하고, 삼촌이자 장인인 탐욕스러운 라반의 음모에서 벗어나야 하며, 빼앗긴 장자의 권한에 화가 나 그가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에서를 대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이삭과 에서를 속이고 수십 년 동안 방랑 생활을 하며 쌓아온 자신의 죄책감을 내려놓아야 했다. 야곱에게 고향은 타인의 시선과 타인이 붙여준 별명, 그리고 불운한 과거와 쓰라린 열등감과 내적 갈등이 모인 덩어리였다. 이 과거의 야곱을 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

야곱은 마침내 에서와 얼굴을 맞대고 용서를 구하리라 결심한다. 그러나 에서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서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전령을 보내 이렇게 말한다.

 

[32:4-32:5]

(32:4)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32:5)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야곱은 자신이 더 이상 속임수를 일삼는 어린아이가 아니며 경제적으로도 성공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임을 부각시키며 형에게 호소했다. 자신이 재산이 많다는 것을 알리면 에서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아직도 자산이 가지고 있는 부를 우상으로 여기는 마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에서를 만나고 돌아온 전령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들은 야곱이 상상하던 시나리오대로 최악의 상황을 전한다.

(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이것은 결코 야곱이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다. 야곱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자 그는 400명의 용병을 대항할 방도를 찾았다. 그는 종과 가축과 낙타를 둘로 나누었다. 에서가 한쪽을 공격하는 틈을 타 다른 한쪽은 도망을 칠 셈이었다. 야곱은 이 위기의 순간에 신을 찾았다.

 

[32:7-9]

(32: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32:8)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32: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기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신에게 떼를 쓰면 들어주는 마술지팡이 쯤으로 생각 한다. 한자 기도(祈禱)‘를 풀이하띤 자산의 목숨을 자산의 도끼()로 찍으려는 시늉을 하며 간절히 원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가 이와 같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사람에게 아무런 삶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 지를 깊이 묻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만을 무작정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도는 오히려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행위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설친 야곱은 아직도 형의 분노를 삭일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200마리의 암 염소와 20마리의 숫염소, 200마리의 새끼 암소와 20마리의 새끼 수소, 30마리의 낙타와 그 새끼들, 40마리의 암소와 10마리의 수소, 20마리의 암탕나귀와 10마리의 수탕나귀를 골라 첫 번째 팀과 함께 보냈다. 가축들이 에서가 사는 진영에 도착하자 야곱의 종들은 에서에게 당신의 종 야곱은 우리 뒤에 오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야곱은 자신이 보낸 뇌물을 보면 형이 자산을 용서해줄 것이라고 착각한다.

뒤에서 멀찌감치 다른 팀과 함께 따라온 야곱은 저녁이 되어 압복 강가에 도착했다. 이 강만 건너면 형 에서가 있다. 야곱은 아직도 과거의 수동적이며 철들지 않은 자아로 인해 어린아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다. 겁쟁이 야곱은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먼저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는 두 아내와 두 여종 그리고 모든 아이들을 배에 태워 강 건너편으로 보냈다. 야곱은 만에 하나 어떤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강 반대쪽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이름 야곱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곱에게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미래에 대한 위대한 비전이나 자기희생을 찾아볼 수 없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꿈을 실현되기까지 100년이나 기다릴 정도로 끈기와 인내의 신앙이 있었다. 그는 신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오히려 금지옥엽 같은 자신의 아들을 신에게 바치려 했다. 이삭은 스스로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되고자 했다.

반면 야곱은 우리네와 비슷하다. 그는 어려운 일을 회피하고 남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며 대책 없이 기다린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신의 명령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신과의 계약을 지키려 하기보다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원망한다. 야곱은 전략적인 생존자다. 신을 의지하기는 하나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신을 포함한 모는 것을 버릴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야곱은 다음 날이 되면 형을 만나야 하지만 그의 심중을 알 길이 없었다. 형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했다. 우리는 왜 이러 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일까. 야곱은 이제 일생 동안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자기라는 괴물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홀로 사막에 남아 있었다.

적막하기만 한 사막의 한가운데서 야곱은 숨기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가출했던 20년 전을 떠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세월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 부를 이루었지만 지금 이 순간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에 대해 생각했다. 강 건너의 불꽃이 가물가물하며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신과 씨름해 이긴 자, 이스라엘

강은 예로부터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을 구분하는 자연적인 경계이자 문명의 발상지다. 강을 중심으로 공동체와 국가가 형성되었고, 강을 건넌다는 의미는 자신이 속한 익숙한 세계를 떠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인생에서 중요한 단계를 넘어선다는 상징이다.

그리스 신화의 스틱스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고, 성서의 요단 강 또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이다. 구약성서에서 홍해는 오합지졸과 광야 40년 생활을 감행할 신앙 공동체를 분리시키는 리트머스이며, 로마 장군 시저 역시 루비콘 강을 건넌 후 로마제국의 절대 지도자가 됐다. 야곱은 자기 재산과 가족들을 모두 강 건너로 보내지만 정작 자신은 건너가지 못한다. 야곱이 베델에서 술람을 본 것을 새끼 거북이가 카벙클로 알을 깨고 나온 것과 비교한다면, 압복 강은 새끼 거북이가 헤쳐 올라가야 할 30센티미터 두께의 모래이자 그곳에서 탈출해 바다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하는 여정이다.

야곱은 홀로 남아 있었다. 성서는 어떤 사람이 야곱을 붙잡았다고 기록한다. 갑자기 어떤 낯선 자가 나타나 아침까지 야곱과 씨름을 했다. 히브리어에서 얍복씨름하다와 어원이 같다. 낯선 자는 도저히 힘으로는 야곱을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야곱의 엉덩이뼈를 부숴 놓는다.

날이 새려고 하자 낯선 자는 해가 떠오르니, 나는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여기서 축복이라는 의미는 삼라만상의 뜻에 맞추어 자신의 운명을 깨달아 알고 그것에 복종하는 행위다. 야곱의 말은 내가 왜 사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는 편이 낫겠다.’라는 의미다. 야곱의 목숨을 건 간절함에 낯선 자는 감탄한다. 낯선 자는 야곱의 소원을 들어줄 참이었다. 그가 야곱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낯선 자에게 야곱입니다라고 대답 한다. 그러자 낯선 자는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라고 말한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어준 이 낯선 자가 누구 인지 궁금해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는 알 필요 없다면서 그 자리를 급히 떠난다. 이 낯선 자는 누구일까?

그는 야곱 안에 자리하고 있는 과거에 사로잡힌 인간, 과거 지향적 인간인 야곱의 어두운 제2의 자아일 수도 있다. 야곱은 밤새도록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자기와 씨름한 것이다. 야곱은 이 부정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그는 지금까지 형 그늘에 가려진 채 엄마 치맛자락만 잡는 어린아이,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삼촌에게 속임을 당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인간이었다.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았다. 야곱은 이제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버틴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야곱이 아니라 신과 겨루어 이긴이스라엘이다.

낯선 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성서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바로 이다. 성서에서는 이 신을 이쉬(ish)’, 보통 인간으로 지칭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신은 사막 한가운데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며, 그 신은 누군가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과 장소에 신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간 세 명의 낯선 자들은 그들의 손자 야곱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야곱은 이 낯선 자를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동이 트자 야곱은 압복 강을 건넌다. 야곱은 엉덩이가 어긋나 절뚝거리고 있었다. 강을 건너자 자신의 두 아내와 아이들이 살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 에서가 건장한 청년 400명을 데리고 그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과 종 그리고 가축들을 둘로 나눈 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맨 뒤에 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맨 앞에 섰다. 더 이상 야곱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야곱은 신과 싸워 이긴 나 이스라엘이 누구를 대적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다가오는 형 에서 앞으로 나아가 그가 가까이 올 때까지 일곱 번이나 정성스럽게 절을 했다. 절을 마친 야곱은 엉덩이의 통증으로 겨우 일어섰다.

그러자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커다란 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고 입 맞추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33:8-33:11]

(33:8)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33:9)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33: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리라

 

에서와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임에도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고 지낸 자신들의 모습과 상대방이 겪었을 고통의 세월을 헤아리며 한참 동안 울었다. 이 눈물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눈물이다. 에서는 야곱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였다. 야곱은 압복 강의 경험을 통 해 원수 같고 두렵기만 했던 형 에서가 신처럼 보였다.

야곱 이야기는 발뒤꿈치로 태어나 평생 남의 눈치만 보던 인간이 훗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조상이 되는 인간 승리의 과정을 보여준다. 야곱의 승리는 운명과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다.

야곱은 부모와 형을 떠나 20년 동안 방황했지만 신을 만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이스라엘 신과 겨뤄 신을 이기는 존재란 바로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자신과 형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다. 비록 다리를 절뚝거리는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모든 사람을 신처럼 여길 수 있는 성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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