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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님께 드릴 양이 어디에 있는가? 이상욱 201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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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드릴 양이 어디에 있는가?

22:2

인생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바라보는 입장(숭고미와 비장미의 관점)에서 비극이 생겼고, 즐겁고 우스꽝스럽게 바라보는 입장에서 희극이 생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주인공이 완전히 선해도 안 되고, 완전히 악해도 안 되고, 그릇된 판단 또는 성격적 결함이 얼마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비극적 결함'이라는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더 자기 파멸로 가까이 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사태에 올바르게 대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가 옳다고 믿고 용기 있게 행한 행위가 전혀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것을 '비극적 아이러니'라고 한다.

 

헬라의 오이디푸스 신화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적인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다룬 작가는 소포클레스다. 소포클레스가 남긴 일곱 개의 비극 작품 중 세 편의 작품을 테베 비극이라 부른다. 세 편의 테베 비극오이디푸스 왕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그리고 안티고네. 이 세 작품은 테베의 왕이었던 오이디푸스가 운명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3대에 걸쳐 지속되는 오이디푸스 왕가의 비극은 인간으로서 피 할 수 없는 운명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그의 부인 조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이 저주는 사실 라이오스가 왕이 되기 전부터 시작된다. 저주는 갑자기 능장하지 않는다. 저주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에 대한 당연한 결과다.

라이오스는 왕이 되기 전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피사의 왕 펠롭스에게로 도망쳐 피난 생활을 한다. 그는 언젠가 테베로 돌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프스에게 전차를 모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라이오스는 유소년 크리시프스를 네미아에서 열리는 경기에 참여시키기 위해 데리고 가는 척하다가 그들 테베로 납치해 강간한다.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비극의 시작이다. 이 범죄는 라이오스 가문과 그의 도시 테베의 저주의 발단이 된다.

라이오스는 태어난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다 라이오스는 이 아이의 뒤꿈치를 묶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만든다. 발뒤꿈치는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와 유대의 조상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신화소다.

그는 한 목동에게 이 아이를 키타이론 산에 버리도록 명령한다. 아이의 발은 나면서부터 묶여진 터라 퉁퉁 부어 있었다. 이 아이는 오이디푸스’, 발이 퉁퉁 부은 (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목동은 오이디푸스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근처 도시 고린도에서 온 한 목동에게 넘긴다. 그리고 그 목동은 이 아이를 마침 아들이 없어 아이를 찾고 있던 고린도의 왕 폴리보스에게 보낸다. 오이디푸스는 폴리보스 부부를 자신의 친부모로 알고 자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폴리보스 왕이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델피로 가서 신탁을 받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인간으로서는 경험해서는 안 될 최악의 예언을 듣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 고린도로 돌아가지 않고 델피 근처에 있는 테베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테베는 자신의 친부모가 있는 도시가 아닌가!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는 중 세 갈래 길로 나뉘는 교차로에 도착한다. ‘세 갈래길은 플라톤의 용어를 빌리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장소다.

그는 그곳에서 전차를 타고 가는 테베의 왕이자 자신의 친부인 라이오스와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누가 먼저 길을 지나가느냐 하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한다.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의 친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극복해야 할 과거 관습, 관행, 습관, 편견의 상징이다. 인간이 스스로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청산이 필수다. 여기서 과거란 자신의 선택이 아닌 그에게 알게 모르게 부여된 정신적, 사회적, 역사적인 얼개들이다. 인간이 스스로 서기 위해서는 이 얼개들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 재점검하고 재 선택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뒤 테베의 성문으로 향한다. 테베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스어 스핑크스는 새로운 단계로 무모하게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목을 조르는 존재라는 뜻이다. 머리는 인간이고 등은 사자며 새의 날개를 가진 스핑스크는 테베로 들어오려는 자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이 수수께끼를 풀면 성문을 지나 테베로 들어갈 수 있지만, 만약 문제를 풀지 못하면 스핑크스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수수께끼는 한목소리를 가졌지만, 아침엔 네 발로 걷고, 오후엔 두발로, 그리고 밤엔 세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어른이 되어선 두 발로 걷고, 늙은이가 되어선 지팡이까지 포함해 세 발로 다닙니다.”라고 대답한다. 그의 대답에 스핑크스는 당황한다. 그리고 그는 경계를 지키는 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 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려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가 몸을 던진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죽이고 테베의 질서들 회복했다는 이유로 테베의 왕이 된다. 그는 미망인이 된 라이오스의 아내 조카스타들 아내로 맞이한다. 그러나 조카스타는 사실 그의 어머니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델피 신탁의 두 번째 예언을 완성하고 말았다.

오이디푸스와 조카스타는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그리고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를 낳는다. 테베에 다시 역병이 돌자 오이디푸스는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테베의 불행이 자신이 저지른 아버지 살해와 근친상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어머니이자 아내인 조카스타는 목을 매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그녀의 시신에서 발견된 옷 장식 핀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성급했는지 후회하면서 한 순간의 죽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눈을 상하게 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끼친 해악을 감내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인 관계는 성서에 등장하는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삭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성서는 그리스 비극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비극 이야기를 풀어낸다.

 

유대인의 오이디푸스 신화, 아케다

유대인들은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아케다(Aqedah)’라 부른다. 아케다는 히브리어로 묶기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치기 위해 제단 위에 묶어놓은 사건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등장해 아브라함에게 무지막지한 요구를 한다. 당신에게 이와 유사한 사건이 실제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창세기> 22장에는 이와 같은 악몽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소중한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아들을 사막으로 데려가 무참히 살해해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고자 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희생시키라고 명령하자 그는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그 명령을 따른다.

미국 문화에서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남북 전쟁과 노예 제도들 종식시킨 아브라함 링컨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별명은 위대한 해방자(the Great Emancipator)’정직한 아베(Honest Abe)’이었다. 작곡가 딜런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미국식 영어로 줄여 아베(Abe)’라 한다. 아베는 미국 역사에 있어서는 정의와 자유의 상징이지만,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라는 노래에서는 정의와 자유의 부재, 폭력의 상징으로 묘사됐다.

아베는 자신이 무엇에 의해 조정 당하는지 알지 못한다.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콤플렉스가 자신을 비극으로 내몰아도 그는 이 상황을 직시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아베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 하는 이 끔찍한 범죄를 실행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덤덤하게 어디서 죽이면 되죠?”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61번 고속도로에서라고 대답한다. ‘61번 고속도로는 미국의 남부 뉴올리언스부터 북부 미네소타 덜루스까지 남북을 가로지르는 2,758킬로미터에 달하는 가장 긴 고속도로다. 그러므로 61번 고속도로는 곧 미국전역이라는 의미다.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의 행동은 앞서 설명한 라이오스 콤플렉스(Laius complex)’의 전형적인 예로 해석할 수 있다. 부정적인 아버지 상의 원형인 라이오스 콤플렉스는 거의 모든 산화에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우주 최초의 하나님인 강물 신 압수(Apsu)’와 바다 신 티아맛(Tiamat)’은 시끄럽다는 이유로 자손들을 몰살하려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우주 통치자인 자신의 아버지이며 하늘 신인 우라노스의 권력을 탐내 어머니 가이아와 함께 낫으로 아버지의 성기를 자른다. 이 성기를 바다에 던지자 그 안에서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가 등장한다. 크로노스도 자신의 자녀로부터 살해당할 것이라는 운명을 알게 되어 레아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데메테르와 헤라, 하데스, 헤스티아 그리고 포세이돈을 삼켜버린다.

구약성서 출애굽기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히브리 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을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다. 신약성서 마태복음도 로마의 헤롯왕이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학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적인 존재가 되어 영생을 누려야 한다. 자신의 자식들을 살려둔다는 것은 언젠가 자신이 죽고 그 자식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들은 살아남기 위해 우선 아버지의 질시로부터 벗어 나야한다.

아케다 이야기는 창세기 22l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힌네니(hinneni)

이러한 맥락에서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를 다시 해석 해보자. 아브라함은 창세기21장에서 일생의 정점을 찍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 그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주위에 거주하던 유력자들이 와서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신이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영원한신의 이름을 부르며 영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였다. 아브라함이 방랑 생활을 시작한지 25년 만의 일이다.

그러던 아브라함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삭이 젖을 뗀 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맏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을 것을 요구한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창세기 21:8-11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한 아브라함은 애지중지하던 하갈과 이스마엘을 약간의 마실 물과 빵을 주어 브엘세바 사막으로 내쫓는다.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왜 이러한 끔찍한 일을 해야만 했을까?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그러한 일을 행한 이유에 대해 신이 그에게 사라의 말을 따르라고 명했기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한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사막을 헤매며 죽음을 경험하는 이 사건은 아케다 이야기에서 이삭과 사라가 경험하게 될 사건의 전조다.

아브라함과 사리는 아케다 사건을 통해 하갈과 이스마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천사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도움을 받아 살아난 것처럼, 이삭도 천사가 개입하면서 살아나게 된다. 이스마엘의 희생은 이삭의 희생의 예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마옐 사건은 아케다 사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사리는 아브라함이 원하지 않는 일을 요구하고 관철시킬 뿐 아니라 신까지 동원해 자신의 바람을 성취한다. 이삭에 대한 사라의 집착이 병적인 것을 감안하면, 아케다 이야기는 이삭을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는 이삭의 통과의례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이삭의 집착관계를 단절하고자 이삭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단단할수록 통과의례의 강도는 더욱 세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이를 당하는 자가 의지가 약하거나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가 실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험하다/증명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 동사 니사(nissah)’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신은 이무나 시험하지 않는다. 신은 몇몇 인간을 특별히 선택해 영웅만이 도달할 수 있는 미션을 부여하고, 신의 임부를 수행 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신은 이 시험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인물이 영웅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성서에서 신으로부터 시험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구약성서의 아브라함과 욥, 신약성서의 예수다.

신이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은 제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힌네니(hinneni)’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아케다 이야기( <창세기> 22:1-19)에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신이 아브라함을 맨 처음 불렀을 때(1), 두 번째는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질문하려고 아버지하고 불렀을 때(7), 그리고 세 번째는 천사가 이삭을 해치지 말라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두 번 불렀을 때(11). ‘힌네니는 신이 자신의 임무를 부여한 특별한 인간을 부를 때, 인간이 신에게 말하는 정형화된 문구다. 힌네니는 흔히 제가 여기 있습니다혹은 제가 당신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로 번역할 수 있다. 신이 모세, 사무옐, 이사야를 불렀을 때도 이들은 모두 힌네니라고 답한다.

힌네니는 신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주파수가 맞춰져 있으며, 신의 부름에 부응해 경청하고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온전히 신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가능한, 신의 미세한 음성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지닌 자가 자신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감탄사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자신 안에 숨겨진 신성을 발견한 자의 영적인 외침이다. 아브라함의 힌네니를 들은 신이 명령한다22:2

 

모리아

모리아는 어디인가? <창세기에서 말하는 모리아는 역대기 하> 31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모리아 산과 동일 지명이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다윗 시대, 다시 말해 아브라함 대로부터 거의 800년이 지난 후에 건설된 도시이기 때문에 모리아라는 지명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서가 기록될 당시 이 오래된 장소의 원래 위치와 의미는 이미 사라져 아무도 모르는 지명이 된 것 같다.

모리아는 지상의 장소가 아니라 영적인 장소다. 우리가 보거나 만실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스스로 발견해야 할 우리 자신만의 성소다. 이러한 모리아는 후대에 기록된 역대기 하31절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질 거룩한 산이 된다.

 

레크 르카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라는 말에서 가거라’‘의 히브리 동사는 레크 르카. 이 말은 창세기> 121절에서 신이 아브라함을 처음 불렀을 때 등장한 것으로 히브리 표현으로 직역하면 너 자신을 위해 가라!’이다. 이 구절을 번역한 영어 성서나 한글 성서에는 르카에 해당하는 너 자신을 위해라는 번역이 빠져 있다. ‘르카는 신이 이 여행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케다 이야기의 저자 인 옐로히스트의 의도일 수도 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에서 해야 할 일은 이삭을 번재로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왜 신에게 항의하지 않았을까? 만일 신이 오늘 밤 꿈에 나타나 그러한 요구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브라함이 이렇게 비이성적이며 극악무도한 요구에 순종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삭을 분석해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하마콤(hammaqom)

아브라함은 밤을 꼬박 새운다. 그는 아내 사라와 이삭을 불러 자신이 들은 신의 음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한다. 사라는 신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신의 요구는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케다 이야기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격한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어머니인 사라일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이 이야기에 한 번도 동장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을 달래고 신의 명령을 수행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바로 이삭이다-22:3-4

 

신이 알려준 모리아는 3절에서 새로운 대명사, 그곳으로 표현된다. “그곳4절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신이 말한 그곳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 것 같다. 2절에서 모리아는 여행을 떠나면 알려준다고 한 미래의 장소였지만, 3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영적인 여행을 떠난 후에는 그들에게 지금의 장소로 인식 된다. “그곳의 히브리어는 하마콤(ham -maqom)’으로 축자적인 의미를 따지자면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장소라는 의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갈망하는 모리아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버릴 때 오는 깨달음이다. 하마콤은 내가 존재하는 이 시간과 장소인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멀리있는 하마콤을 본다. 하마콤은 현재 자신이 발견한 신과 동행하는 특별한 어떤 것이지만, 동시에 미래에도 지향해야 할 영적인 이정표다. ‘멀리 있다라는 말은 시공간으로 미래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나아르-이 건장한 청년

225절을 보자.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아케다 이야기의 주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삭을 지칭하는 이 아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건장한 청년이라고 되어 있다.

사라의 나이가 127세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추정할 수 있다. 아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삭이다. 아케다 이야기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에게 영적인 권위를 넘기는 여행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마콤에 올라가서 할 행위는 한 가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엎드려 절하다라는 히브리어 니쉬타 하워I(nishtahawehl’신이나 왕 앞에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머리를 포함한 온몸을 땅에 붙여 절하다라는 의미다. 이 행위를 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몸을 땅에 대어 절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 붙은 먼지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은 흙으로부터 만들어 진 후 잠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순간을 사는 인간이 무엇보다 스스로 인식해야 할 덕목은 인생의 순간성과 허무함이다.

둘째,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자신의 미션을 부여받은 사람은 이제 먼지와 같은 존재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난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아는 순간, 그는 시공간을 초월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은 상태가 된다.

 

아삭의 단호한 결심

유대인 화가 샤갈은 아케다 사건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여기서 아브라함을 거의 장님으로 표현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그 이삭이 성년이 되었으므로 굳이 아브라함의 나이를 계산한다면 겨우 생명을 부지할 정도라고 예상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사용할 장작을 아들이삭에게 지고 가도록 명령한다. 이삭은 거뜬히 장작을 지고 산을 오르기 시 작한다.

 

에하드-함께

226절이다. 엘로히스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마음을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라고 표현한다. 그는 이 문장에서 의미심장한 단어를 사용하는 데, 바로 함께이다. 히브리어 에하드(echad)’한 마음으로 한 사람처럼 함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케다 사건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에게 희생을 강요한 사건이 아니다. 신의 명령을 듣고 슬퍼하는 아브라함을 위해 이삭이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나선 사건이다.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의연할 수 없으므로 이삭 역시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분명하다.

창세기> 22장에는 에하드가 세 번이나 등장한다. 6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 오를 때,8절에서 이삭에 대한 질문에 아브라함이 대답할 때, 그리고 19절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두 종들도 함께 브엘세바로 갈 때다.

엘로히스트는 히브리 경전 전통인 침묵 속의 웅변(eloquence from silence)'이 충실해 아브라함과 이삭 간의 심정이나 대화에 대해 침묵하다. 이들의 마음을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라는 간결하지만 강력한 표현으로 대신한다. 이 신비한 순간에 침묵을 깬 사람은 아들이삭이다(7-8).

 

마콤-정상

이삭이 고개를 들어보니 모리아 산 정상, 마콤이 보였다. 그는 산 아래로부터 장작을 지고 올라오며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힐끗힐끗 보았다. 내가 왜 이러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나? 이삭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삭은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끝까지 가보기로 결심한다. 이삭은 아버지와의 어색한 적막감을 깨고 아버지를 안정시키고 싶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은 이제 성년이 되었고 자기가 그를 설득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삭은 아버지, 제가 꼭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이 되어야 합니까?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멈춰주십시오라고 말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라고 결심한다.

절규하는 듯한 이삭의 청원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기 전에 신에게 드린 마지막 기도와 유사하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운명을 자조적으로 인정했지만, 점점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신을 향해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절규한다.

 

그들은 이제 신이 말한 하마콤에 도착한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는다9-10.

성서는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놓았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이삭의 자발적인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이삭이 묶이지 않기 위해 저항하거나 도망친다면 아브라함은 결코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신이 이삭을 시험한 시점을 찾으라면 바로 이 순간이다. 이는 이삭의 신앙에 대한 시험이며, 이삭은 자신의 생명 까지 요구한 신의 명령을 기꺼이 따른 순교자다. 이삭이 아브라함, 야곱과 함께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이 될 만한 덕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삭은 제 스스로 자신을 묶고 제단 위로 올라가 아브라함에게 신의 뜻이라면, 용기를 내, 저를 죽이십시오!”라고 말한다. 이삭은 바로 이 순간 이미 죽은 것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자아를 죽여야 하는 의례를 아버지 아브라함 앞에서 의연하게 행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신앙 전통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립하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이삭은 남들의 비웃음을 사던 늦둥이 어리광이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이은 신앙의 표본이자 영웅이 된다.

아브라함은 평상시 자신이 양을 도축할 때 사용하던 칼을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이 메소포타미아 우르에서 시작해 거의 60년 동안 살아온 인생의 장면들을 한순간에 또렷이 회상했다. 자신과 이삭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 제 목숨을 내놓겠다는 이삭의 주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아들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11

 

하늘에서 나온 이 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문장에서 말하는 주체는 야훼가 보낸 천사가 아니라 야훼라고 번역하는 편이 원문에 더 가깝다. 야훼 신의 목소리를 들은 아브라함은 또다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로 힌네니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어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2

 

야레-경외하는 자

신은 아브라함에게 신을 경외하는 자(야레 옐로힘, yare Elohim)"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경외의 히브리어는 야레(yare)'. ”미쉬나(Mishnah)“ ‘선조들의 어록' 13절에 보면 경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가를 받기 위해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처럼 되지 마십시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하늘의 경외(야레)가 당신에게 깃들 것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야레는 자기 삶의 주인, 즉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깨달은 자가 그 일을 자발적으로 할 때 그 행위자에게 서서히 더해지는 카리스마다. ‘야레없이 경전을 연구하는 사람은 보물 창고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나 밖으로 나오는 열쇠는 없는 창고지기와 같다. 신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이 가진 도구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지혜로운 예술가다.

13절에서 아케다 이야기는 위의 문장 전에서 멈춰야 했다. 굳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 있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미 신으로부터 인정받은 신을 경외하는 자가되었기 때문이다. 아케다 이야기를 흔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까지 바치는 신앙을 보여주자 신이 개입해 이삭을 죽이지 않고 희생양을 대신 주었다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아케다에 담긴 의미를 얄팍하게 해석하고 성서 저자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마르크 샤갈 번제 장소로 가는 아브라함과 이삭

렘브란트 판 레인, 이삭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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